고요 관찰 일기
마른 체형에 단발머리, 단정한 옷차림을 한 여성 뒤를 따라 걸었다. 누구나 이 시간이면 어딘가를 향하고 있다거나 시간에 쫓긴다거나 다른 생각에 빠져 있다거나 하는 인상을 풍기게 마련이지만 그 여성에게서는 아무런 신호가 없었다. 존재한다고만 느껴졌다. 다만 그녀 옆에 연필로 그은 ‘고요’라는 글자가 둥둥 떠 있었다. 유연하고 부드러운 동작으로 동행했다. 오래도록 따라 걷고 싶었다. 마치 고요로 만들어진 공기를 마시며 걷는 기분이었다. 여성은 어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 건물에는 탐정 협회와 태권도장 간판이 붙어 있었다. 그래, 탐정이구나. 고요가 만년필 끝 잉크에 매달린 모습으로 다시 그려졌다. 하얀 종이 위를 내달리는 고요. 단아하고 단호하게 그렇지만 여전한. 한걸음 한걸음이 일정하게 찍은 쉼표 같았던 사람.
2022-05-12
고요를 만났다. 지하철에서 내려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향할 때 내 앞으로 들어왔다. 마른 체형에 단정한 옷차림을 보고 알아차렸지만 기억한 것만큼 고요하지는 않아서 의심했다. 휘둘리거나 쫓기지 않는 자발적인 속도였다. 목덜미가 살짝 보이는 단발 머리의 길이도 맞는 것 같았다. 탐정 협회가 있는 건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확신했다.
2022-05-16
고요를 만났다. 이번엔 홍대역에서였다. 막 마른 머리칼, 가지런하게 빗은 건 아니지만 스스로 그 위치에 놓여 정렬된 자연스러운 결이었다. 적지도 풍성하지도 않게 들어찬 숱이었다. 어깨에서 떨어지는 린넨과 골반에서 떨어졌을 검은 면. 몸 어디에도 밀착되지 않고 서로를 연신 스치기만 했다. 한번도 축축하거나 끈적한 적 없었을 것 같은 습도와 햇빛에 잘 마른 냄새가 보였다. 탐정 협회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으로 시선을 꺾었다.
2022-05-24
고요를 만났다. 평소보다 일찍 나왔기에 만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지하철 안으로 들어와 책을 읽으려 할 때 고요는 그 바로 뒤에 들어왔다. 가방이 무거운지 바닥에 내려놓고 어깨를 툭툭툭 두들겼다. 그때 잠깐 얼굴을 보았다. 마른 체형의 연장선에 있는 수축된 얼굴이었다. 책을 덮었다.
놀라운 모습이었다. 샌들처럼 뒷축이 없는 특이한 스니커즈라고 생각했는데 뒷축을 구겨 신은 거였다. 고이 접어 신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겠다. 마치 원래 그런 모양으로 나온 신발처럼 두 뒷축의 접힌 모양이 대칭이었다. 고요다운 단정한 파격이었다. (원래 그런 디자인으로 나온 신발일 수도 있다!) 나무 그늘 아래 누워있는 강아지가 있었다. 이 시간에 이런 자리에 태평하게 누워있는 강아지는 본 적이 없기에 강아지야 하고 불러 보았다. 노파심에 한번 더 강아지야. 배가 슬며시 위아래로 움직이는 걸 보고 안심하고 고개를 돌렸다. 고요와는 조금 멀어져 있었다.
2022-05-25
고요를 만났다. 스크린도어 앞에서 지하철을 기다릴 때 내 옆에 스윽 나타나 섰다. 소리 없는 등장이었다. 나는 놀라지 않았다는 표현으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목적없이 반대편을 바라봤다.
저번과 같은 뒷축이 접힌 신발을 신었다. 캔버스 가방에는 산세리프 볼드체로 된 대문자 C가 크게 찍혀 있다. 휴대폰으로 무언가를 보고 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다.
2022-05-27
고요를 만났다. 늦었는지 평소보다 빠른 걸음이었다. 개찰구를 빠져나와 나는 계단으로, 고요는 그보다 떨어진 에스컬레이터로 향했다. 먼저 올라왔을 거라 생각하고 짐짓 속도를 늦추며 걸었는데 앞질러 가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보니 벌써 저만치 가고 있다. 눈에 익은 단호하고 경쾌한 들썩임이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따라잡기에는 늦었다. 거기서 길을 건넜다.
2022-06-08
고요를 만났다. 내 뒤에서 오고 있었다. 고요는 나보다 걸음이 빠르다. 일부러 늦추지 않아도 앞질러 간다. 오늘은 습도도 높고 월요일인데다가 활기차지 못하다. 계단을 다 올랐을 때 쯤에는 얼굴에 땀이 맺히고 숨이 찼다. 그러나 고요는 무엇에도 영향받지 않는듯 하다. 그러다 그 규칙이 흐트러지는 찰라 누군가 옆에 다가온다. 아는 사람인지 그와 나란히 걷는다. 동시에 어깨가 살짝 올라간 것 같다. 손으로 무언가를 그리며 대화를 나눈다. 웃음 소리가 옅게 들린다. 옆 사람을 향해 돌린 얼굴은 웃는 모습이었다. 둘은 같은 건물로 들어갔다. 거기서 길을 건넜다.
2022-06-20
고요를 만났다. 지하철 안으로 들어가 선 자리에서 뒤로 돌았을 때 뒷모습이 눈 앞에 있었다. 엷은 민트색 린넨 셔츠에 흰색 진을 입고 있다. 이것을 쓰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고개를 들자 검은 배경의 창에 고요가 비친다. 눈이 마주쳤을까봐 바로 눈길을 돌렸다. 오늘은 늦었다. 지하철 문이 열리자 평소보다 빠른 걸음으로 앞서간다. 차는 숨을 고르며 마지막 계단에 올라 저멀리 가는 고요를 봤다. 따라가기에는 날씨가 덥다.
2022-06-22
고요를 만났다. 머리를 묶고 있었기에 한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조금 지친 걸음이었다
펄럭이는 린넨 셔츠를 감도는 공기가 고요의 것이었다
오늘은 분명 조금 처진 걸음 걸이
크로스백 운동화
흔드는 두 팔
그동안은 어깨에 걸친 숄더백을 고정하느라 한쪽 팔은 거의 흔들리지 않았다
길을 건너려는 줄 알았는데 술취한 사람을 피해 빙 둘러 가는 거였다 망설임 없는 우회
2022-06-?
고요를 만났다. 고요도 역사 안 열기 속에서는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등에 한뼘 길이되는 유선형의 구멍이 나 있는 줄무늬 셔츠를 입고 있었다. 전에도 보았던 대문자 C가 찍힌 가방, 검은색 나일론 바지. 굽이 낮은 샌들. 보도블럭과 마주치며 나는 소리가 박수 소리처럼 경쾌했다. 역사 밖으로 나오자 바로 마스크를 벗었다. 더위가 온 몸에 붙었다. 몸에 달라붙는 곳 없이 펄럭이는 옷을 보는 것은 열기를 잊게 했다. 문득 고요를 고요하다고 느낀 건 내가 스스로 그녀 주변의 소리를 지웠기 때문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른 몸매와 그에 어울리는 옷맵씨가 부러웠다. 무어라 혼잣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더위를 탓하는 말이었을까.
2022-07-06
고요를 만났다. 지하철 기둥에 머리를 기대고 휴대폰을 보고 있다. 흰색 티셔츠에 검은색 나일론 바지. 티셔츠는 허리춤을 덮고 있다. 흰색 셔츠에는 세로로 접혔던 주름이 있다. 가방은 어깨에 걸치지 않고 왼손에 들고 있다. 오늘은 어쩐 일인지 역사를 빠져나왔는데도 보이지 않는다. 멀리 바라봐도 없다. 뒤에서 들려오는 바닥을 치는 신발 소리가 고요일거라 예상했으나 다른 사람이다. 걸음을 살짝 늦추었지만 앞서가지 않는다. 뒤를 의식하며 걷는 사이 키가 큰 남성이 지나쳐 간다. 베이지색 린넨 바지가 긴 다리에 곧게 떨어져 살랑 거린다. 자세히 보니 왼쪽 허벅지 부분에 사이즈를 표시하는 스티커가 붙어 있다. 새 옷이라면 실수로 혹은 고의로 제거하지 않은 것일 테다. 알려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길을 건너려 차가 오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도로를 넘어 보도까지 뻗은 눈길에 고요가 들어왔다. 혹시 눈이 마주쳤을지. 차가 오지 않는 걸 확인하고 길을 건넜다. 혹시 내가 자신을 훔쳐본다고 생각해서 걸음을 늦춘 것은 아닐까. 길 건너편으로 아까 그 남자가 보였다. 바지에 붙은 스티커가 반짝였다.
2022-07-12
고요를 만났다. 키가 큰 남성과 웃으며 걸어오는 여성이 어쩐지 고요 같았다. 앞모습은 처음 보았지만 마른 체형과 걸음걸이가 낯익었다. 지나친 후 뒤를 돌아봤다. 고요였다. 내가 아는 고요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야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평범한 사람임을 엿보았다.
2022-07-?
고요를 만났다. 오랜만이었다. 하늘색 셔츠에 남색 린넨 치마를 입고 있다. 치마는 무릎 위까지 온다. 맨다리는 처음 보았다. 종아리가 조금도 무릎 밖으로 휘지 않고 유려하게 흘러내린다. 셔츠 아랫단은 치마 속에 묶인 채 둥글게 부풀어 있다. 대문자 C가 찍힌 에코백을 맸다. 마스크를 한 손에 들고 앞뒤로 흔들며 차박차박 걷는다. 바람이 앞에서 불어온다. 고요의 셔츠를 통과해 오는 바람이 파랗고 시원하다. 탐정 협회 건물에 다다를때 쯤 고개를 살짝 숙인다. 숙인 채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책을 덮듯이 이야기 하나가 사라진다.
2022-08-19
고요를 만났다.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이젠 멀리서도 대문자 C가 쓰인 가방 때문에 알아본다. 오늘은 좀 떨어져 있고 싶었다. 지하철 안으로 들어가 좌석 가운데 쪽에 섰다. 고요는 출입문 앞에 서서 휴대폰을 보고 있다. 고요는 역사 밖으로 나와서 걷는 내내 휴대폰을 가로로 잡고 무언가를 본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에도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2022-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