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가를 닮아 머리만 샌

지하철 문 앞에 머리가 하얗게 샌 노인이 서 있다. 이번 역에서 내릴 것 같아 그대로 앉아 있는데 내 앞쪽에 와 선다. 일어나려 몸을 들썩 하니 다음 역에서 내릴 거라며 손을 젓는다. 문 앞에 서면 걸리적거리고 안쪽에 서면 사람들이 자꾸 일어나려고 해서 불편하다고 푸념한다. 머리가 하얗게 샌 게 이래서 안 좋단다. 하얀 머리칼이 눈에 띄긴 하지만 얼굴에는 충분히 양보받을 수 있는 주름이 있다. 친가 쪽은 머리가 까만데 외가 쪽을 닮아서 이렇게 샜다고 한다. 재킷과 안에 입은 셔츠가 같은 무늬인 것에 눈이 간다. 저렇게 세트로도 파는구나. 경복궁역이다. 문이 열리자 스케이트를 타듯 바닥을 쓸며 노인의 발걸음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동작으로 문밖으로 나간다. 나이에 안 맞아 어색하다면 쉬웠을 텐데 부러울 만큼 깜찍하다. 기분 좋아지는 리듬감과 몸짓을 갖췄다. 몸 안에 아이가—외가를 닮아 머리만 샌—들어 있다.

2022년 10월 12일